김씨잡변/잡담 11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오늘 문득 다시금 왜 나는 그에게 내 일상을 나누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머리를 스쳤고, 동시에 명확한 답을 얻었다. 이런 곳을 좋아한다 가고 싶다고 직접 공유하는 것들도 기억 못 하는데, 일상 이야기는 당연히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처럼 다 흩어질 정보라는 걸 알기에 애초에 공유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슬프게도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아직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조금 더 신경 써주길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나 보다. "힘든 일 있으면 말해." 그와 아무리 매일 얘기를 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건 쌓이거나 사이가 두터워지는 대화가 아니라 그냥 뱉고 있는 말인데 최근에 힘들긴 했나 보다. 아무리 힘들 때 곁에 있어줄 거라고 해도 그저 입에 발린 말이고, 내가 힘들 때 절대 그는 날..

김씨잡변/잡담 2023.10.01

"아빠는 뭐든지 될 수 있어."

어른이 된다는 건 실망을 지나 두려움을 건너 이해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늘 같던 존재들이 똑같이 그저 한 명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고, 거대하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마주하며, 결국 나도 시간을 피할 순 없다는 걸 머리로 마음으로 이해하는 과정인 게 아닐까 싶다. "아빠는 뭐든지 될 수 있어!" 조카의 말에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아렸다. 그치 나도 저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저 말을 듣는 오빠는 얼마나 행복할까? 또 동시에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지금의 나로선 알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겠지. 어린 날의 나에게 부모님은 뭐든지 할 줄 아는 만능 재주꾼에, 무엇이든 답을 아는 척척박사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어릴 때 오빠와 나를 낳아 기르셨고, 나..

김씨잡변/잡담 2023.02.15

"손님은 왠지 이해하실 거 같았어요."

계속된 초과근무로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심력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어느 날이었다. 기사님과 선을 넘는 대화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서, 혼자 택시 타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날을 넘겨서 집에 들어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던지라, 그 시간엔 집에 갈 수 있는 수단이 택시뿐이니 집엔 가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오늘 안에 집에 갈 수 있겠구나'하며 택시를 잡았다. 평소처럼 '안녕하세요 기사님' 하며 탑승했다. 어떻게 갈까요 하는 질문에 '내비게이션 따라 가주시면 돼요'하고 대답하곤 창 밖을 보며 피로한 눈을 달랬다. 까만 도심에 반짝반짝 빛이 박혀있는 장면을 스치며 꼬리잡기 하듯 흘러가는 생각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사는 게 다 이런 걸까? 피곤하다. 막판에 그렇게 바꿔..

김씨잡변/잡담 2022.06.25

"안정화되면 다시 열심히 나갈게요. 곧 뵈어요."

울컥하고 이유모를 우울함과 불안함이 덮쳐왔다. 피곤한 탓이었을까? 당장에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우울해서 집에 가야겠어.' 말도 안 된다고, 어이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유를 들며 집에 돌아갔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뒤척이다 새벽을 새웠다. 덕분에 엉망진창 해야 할 일들을 못한 주말이었지만, 잘 쉬었으니 다행이라며 혼자 다독였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일주를 시작해야지, 조금이나마 못한 일을 해야지 하는 22시 33분, 문자가 왔다. 복숭아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관장님의 부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알림을 눌렀더니 맞단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체육관을 처음 다니기 시작한 건 2011년이었다. 지금도 관장님을 생각하면 담아두는 게 많은 여린 분인 걸 알면서도 무섭다는 감정이 같이 올라온..

김씨잡변/잡담 2020.05.25

"저기! 오로라야!"

장관을 기대하며 간 여행은 아니었다. 친구의 제안이 있었고, 다른 사람과 같이하는 여행이 궁금해서 흔쾌히 승낙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가있는 '오로라 보기'는 큰 감흥이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보면 좋고 안되면 말고 정도의 가벼운 느낌. 무엇보다 여행 직전 경비때문에 혼난 탓이 컸으리라. 돈을 써서 사소한 작은 일을 하는 것에도 예민해지기 일쑤였다.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다. 육체적으로 지칠때면, 대화를 따라가기 버거웠다. 지금쯤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구나'하며 새삼 속으로 좌절했다. 말에 익숙하고 말하는 것에 자신이 있는데, 원하는 것을 원하는 수준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당연히 몰랐겠지만 표현도 안 해 놓고선,..

김씨잡변/잡담 2019.01.23

"괜찮아요. 어떻게든 되겠죠."

엄마는 하룻밤 새 폭삭 늙으셨다. "괜찮아요. 어떻게든 되겠죠." 가장 수능과 비슷하다던 9월 모의고사처럼 수능을 볼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대로 안 풀리는 법이고, 모의는 모의고 실전은 실전이었다. 수험표 뒷면에 고이 적어온 번호들과 정답을 맞춰가며 발밑이 점점 아득해졌다. 그동안 뭘 위해 공부를 했던 것일까? 그저 이건 긴 인생 속 한 번의 기로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어떻게든 다독이는데, 그보다 더 큰 자괴감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덮쳐왔다.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집안에서 건 기대가 남달랐다. 문득 엄마의 저 슬픔은 나를 위한 슬픔인 걸까라는 물음이 가슴에 맴돌았다. 대학을 잘가면 만사형통인줄 아는 시대의 사람이라, 수능을 망친 그때의 나는 절망이라는 단어가 참 잘 어..

김씨잡변/잡담 2019.01.13

일용직 노동자 김씨의 공백기

앞선 글과 모순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2016년부터 2018년 3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래저래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정기수입이 있는 취직보다는 하루벌어 며칠 연명하는 일용직의 삶이었고,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3년. 3년을 단순히 공백기로만 볼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다만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눈치를 키운 내 3년을 나라도 좋게 봐주기로 했다. 교정교열, 논문 번역, 서신 번역, 영어 과외, 행사 진행요원, 축제 스태프, 사무보조, 단순 포장, 시험 진행요원, VIP 리에종, 공모전 검수요원, 외국인 모델 촬영 현장 담당자, 회의록 작성 아르바이트, 의전 아르바이트, 팝업스토어 아르바이트, 진로관련 강연자, 진로상담행사 보조, 사이버대학교 조교, 카페 아르바이트,..

김씨잡변/잡담 2019.01.03

"다른 이야기지만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오늘도 중고로운 평화나라와 블로그 구매 업체가 섞이면 끔찍한 혼종이 되는데, 얼마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짐을 정리하며 아끼던 만화책들을 판매하려고 중고나라에 글을 올려 두었다. (빨리 팔렸으면 좋겠다 흑흑) 만화카페 붐이 한 차례 지나간 것인지, 아니면 마이너한 작품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판매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어서 다른 좋은 사람 손에 들어갔으면 하는데, 알바 중 물건에 관심이 있다는 문자가 왔다.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려는데, 이때 얘기를 그냥 멈췄어야 했다. 카톡으로 이야기를 해도 되겠냐고 물으셔 괜찮다하니, 중고거래가 처음이라며 상대가 운을 띄웠다. 중고거래가 처음이라도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일단은 설명을 했다. 직거래는 이러하고, 배송거래는 이러하다. "아 그렇..

김씨잡변/잡담 2018.12.30

취업준비생이란 거지같음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얘기를 털어놓기 앞서 간단하게 취업 준비라는 단어를 곱씹어보니 참 이상하더라. 뭐 그리 취업하는 게 준비가 필요한 일이라고, 라고 생각한 과거의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괜히 이런 단어가 생긴 게 아닌 것 같다. 일반적으로 취업준비생(이하 취준생)이라는 신분이 되는 것은 참 거지같은 일인데, 크게 세 가지로 거지같다. 1. 만사에 예민해진다. 2. 돈이 없다. 3. 자존감이 낮아진다. 세 가지라고 말했지만, 따지고 보자면 별로인 점은 무궁무진하다. 말은 이렇게 해도 주변의 인정 대신 동정과 걱정을 받아서 그렇지, 나름 재밌게 잘 지냈다. 앞서 말한 세 가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로, 만사에 예민해진다. 적을 둘 곳이 없거나 없어질 예정으로 불안이 몸을 휩쓸어서 건강도 나빠진다. 눈 ..

김씨잡변/잡담 2018.12.28

"베이글녀 뜻 알아?"

"베이글녀 뜻 알아?" 그는 뜬금없이 베이글녀 뜻을 아냐고 했다. 얘기가 끊긴지도 며칠인데, 밑도 끝도 없이 온 카톡이었다. 원래 단어 자체도 별로 좋아하는 합성어는 아니기에 살짝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는 모니터 너머의 이런 썩은 표정을 보지 못하니 아, 문자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메시지로는 'ㅋㅋㅋㅋ'라면서 알고 있는 뜻을 말했다. '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인 여자 아니에요?' 갑작기 대화가 시작됐기에 그래도 호기심이 생겼다, 무슨 얘기를 하려 그러지? "배가 이래서 글러 먹은 녀 아님?"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얘길 하는 걸까? 저기서의 '녀'는 누구이며, 사람 배를 가지고 뭐라 할 수 있는 게 있는가. '이렇다'는 건 뭘까. 며칠만에 이건 뭔 소리지. 왜 나한테 말을 거는 걸까? 혼돈의 ..

김씨잡변/잡담 2018.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