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컥하고 이유모를 우울함과 불안함이 덮쳐왔다. 피곤한 탓이었을까? 당장에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우울해서 집에 가야겠어.' 말도 안 된다고, 어이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유를 들며 집에 돌아갔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뒤척이다 새벽을 새웠다. 덕분에 엉망진창 해야 할 일들을 못한 주말이었지만, 잘 쉬었으니 다행이라며 혼자 다독였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일주를 시작해야지, 조금이나마 못한 일을 해야지 하는 22시 33분, 문자가 왔다. 복숭아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관장님의 부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알림을 눌렀더니 맞단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체육관을 처음 다니기 시작한 건 2011년이었다. 지금도 관장님을 생각하면 담아두는 게 많은 여린 분인 걸 알면서도 무섭다는 감정이 같이 올라온다. 그만큼 강인하고 언제든 계속하여 있을 것만 같은 분이었다. 건강이 나빠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은 작년 12월로, 좋지 않은 회사에 붙잡혀 인턴 신분을 가지고 야근을 밥먹듯이 하던 시절이었다.
"안정화되면 다시 열심히 나갈게요. 곧 뵈어요."
열심히 우는 이모티콘과 보낸 저 말이, 관장님에게 건넨 마지막이었다. 매년 해오던 안부 문자도 올해는 도저히 마음이 들지 않아서 보내지 않았고, 스승의 날에도 보낼까 말까 하다가 어영부영 넘어가버렸는데 그게 끝이 되어버렸다. 당연하게 아직은 젊은 나이이시기에,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열정이 가득한 분이셨기에, 수술도 병도 잘 이겨내고 다시 내 이름을 호통 치며 체육관에서 기다리고 계시고 있을 줄 알았다.
2월 중순 즈음 어떤 진단을 받으셨는지 조용하게 알게되었고, 2월 말 코로나로 인해서 체육관이 무기한 휴관을 시작했다. 회원 분들이 떠들던 단톡방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이었다. 휴관이 끝나면 다시 가야지 했는데, 코로나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생활은 정적인 듯 동적인 듯 어지러운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그런 와중에 툭 던지듯 온 부고.
여지껏 내가 다녀왔던 세 번의 장례식은 중간의 누군가를 알 뿐, 내가 아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 같은 학교 누군가가 죽었대서 어렴풋한 기억으로 있는 초등학생 때의 장례식, 아는 언니의 할머님의 장례식, 친구의 아버님의 장례식. 고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갑작스러웠지만 관장님의 소식은 오던 잠을 밀어내기 충분했다.
관장님의 부재가 내 삶을 요동치게 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체육관 관장님이었을 뿐이다. 관장님에게 난 그저 열심히 다니는 회원 하나였을 것이다. 열심히 싸우고 계신다는 소식을 알게됐을때 문자라도 하나, 카톡이라도 하나 보낼 걸. 스승의 날이라는 좋은 명목도 있었는데, '에이 뭐 나중에 하지'하는 안일함이 나와 관장님의 마지막이었다.
산다는 게 참 무언지, 만나고 헤어지며 우리는 또 살아간다. 준비되어있든 준비되어 있지 않든 다가온 일을 마주해야겠지만, 조금이라도 준비가 되었을 때 다가왔다면 이토록 허무하진 않았을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자기계발에 아낌없는 분이었고, 고여있지 않고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길 원하는 야망이 있는 분이었다. '-이었다'라는 말에 한 번 더 마음이 아릿해진다.
많이 웃으라고, 건강이 제일이라고 하던 관장님의 말을 새겨야지. 복숭아 꽃을 닮아야지. 달콤한 안주에 머무르지 말고 자신을 돌보며 조금이라도 나아가야지. 후회하지 않도록 온마음으로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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