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때마다 어이가 털리는 말 중 단연 최고인 말이 있다.
"네가 먼저 꼬셨잖아."
스틱스 강에 걸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점인데, 아무런 교류가 없는 상태일 때, 여태껏 먼저 꼬셔본 적이 없다. 종종 듣게 되는 저 말을 돌아보면, 상대의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가장 마지막으로 저 대사를 들었을 때는 꽃뱀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몇 주 정도 이야기를 하고서야 만난 사이였고, 두 번째 만남인가에 스킨십이 있었다. 어차피 연애 생각도 없는 시점이었기도 하고, 고백하자면 스킨십에 큰 의의를 두는 편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날 헤어지고 난 후, 그는 갑자기 연락되지 않았다. 약 한 달 뒤, 아무렇지 않게 연락이 왔다.
"뉴스 보면 막 성추행이니 성폭행이니 그런 식으로 많이 퍼지니까..."
정말 순진한 환상이다.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지만, 그게 유의미한 통계일 줄은 몰랐다. 그게 쉬운 줄 아나. 당시에 할 일도 없었고, 심심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저 꽃밭 속에 있는 뇌가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너 그만큼 능력 돼? 그런 거 맘먹고 하는 사람들 돈 냄새 되게 잘 맡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자네를 후보군에라도 둘 거 같니? 범죄로 따지면 내가 더 위험한 상황인데, 그게 무서워서 차단하고 잠수라."
"내가 겁이 많아..."
본인을 가엾이 여기라는 거였을까. 이쯤 되면 꽃뱀이라고 불릴 말한 전문 사기꾼들에게 미안했다. 본인들 능력을 이렇게 낮춰 평가받다니.
"본격적으로 고소하고 하려면 얼마나 준비 많이 해야 하는지 알아? 난 실제로 성폭력을 당하고도 못했는데, 참 쉽게 말하네. 나를 그렇게 본 것도 불쾌하고, 네 의견은 잘 알았으니 연락 안 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리 가벼운 관계라도 너머엔 사람이 있는 건데, 예의 지킨다고 누가 되는 경우는 없지 않을까?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잘 지내고,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시 안 볼 거야?"
"내가 널 보고 싶어 할 일은 없을 거야."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을지 모르겠고, 다시 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는 것도 웃겼다. 이렇게 마무리가 될 줄 알았지만, 두 달 뒤 "잘 지내?" 하며 메시지가 왔다. 추억도 있고 보고 싶다는 그의 연락이었다. "우리 사이에 추억이 뭐가 있어. 수고하렴." 그래 차단을 박았어야지. 과거의 나 반성해라 하며 차단을 눌렀다.
소위 꽃뱀으로 불리는 전문 사기꾼에게 걸릴 정도의 재력을 갖추고 있긴 하던가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객관화할 줄은 아는 사람을 만나자. 아마 제대로 만났다면 많은 부분에서 상대를 탓하는 자기 연민이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기 연민도 심하고, 일이 있으면 상대 탓을 하려는 사람을 만나서 긍정적인 관계를 쌓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결하려는가가 관계 형성의 또 다른 열쇠임을 깨달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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