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기억에 좋게 기억된다는 건 기쁜 일이다. 오랜만에 오는 연락은 주로 발그레 미소 지으며 받지만, 상대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연락은 하고 싶을 때만 하다 잠수 타고, 2년도 더 지나 '연말인데 잘 지내고 계시나요?' 하며 물 위로 슬며시 떠오르는 경우엔 입꼬리가 아니라 눈썹이 올라갈 수밖에.
'아, 네'하고 끝내버리니 상대는 자길 그래도 기억하고 있냐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몇 차례의 질문이 오가고, 얘기하다 어느 날엔가 급 만났던 사람이란게 기억났다. 한 번인가 두 번밖에 보지 않은 사람에게 연락한다는 게 재밌었다. 뭐가 그렇게 인상이 깊어서? 그의 답변은 몸매를 잊을 수가 없다는데, 그렇다고 2년도 더 넘어서 연락을 하다니 주변에 그렇게 여자가 없나 싶었다.
그는 파트너 제안을 했고, 나는 데이트 메이트를 역제안했다. 실제로 봤던 기억이 희미하다 보니 다시 만나서 어떨지 재기 위한 초석이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가까스로 에피소드 정도만 기억이 나는 그는 '너한테 상처되는 일이지 않을까' 같은 소리를 하더라. 상처받을 까 봐를 쓰게 만든 자아 탱천의 어린 친구들 대사를 여기서 다시 들을 줄이야.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그럴 일 절대 없으니 걱정 말아요'하며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려 하니 미리 약속을 잡는 건 힘들다고 했다. 워낙 바쁘고 유동적인 직업이라 언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어쩌라는 건지.
딱히 그를 위해 꾸민다든가 하는 시간을 쓰거나 노력할 생각도 없었기에, 약속이 언제 취소되든 못 본다는 연락만 해주면 상관 없다고 해도, 그는 시간을 확정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라도 조정하는 편이나, 딱히 그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꼭 만나야 하는 사이도 아니기에, 약속 하나 못 잡는 것에 짜증이 났다. 누구는 시간이 남아돌고 할 게 없어서 보자고 하는 줄 아나. 만나러 오는 길에 갑작스레 방송 스케줄이 바뀌거나 하는 경우도 봤기에 상당히 유동적인 것은 알지만, 그 분야에서 일한 시간이 얼만데 아예 약속 시간 각이 안 나온다니? 주말엔 골프 약속이 잡히고 하면서, 2-3시간 만날 약속 시간 하나를 못 잡는다는 것은 프로 자질에 의심을 키울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다른 만남들보다 후순위이고 자는 게 목적이니까, 내 시간을 존중해 주지 않아 생기는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는 참 예쁘게 말했다. 다정다감한 그의 말에는 '너무 섹시해', '왜 이렇게 예뻐', '귀여워 안아 주고 싶다' 같은 겉핥기의 알맹이 없는 칭찬 뿐이었다. 어차피 가볍게 볼 사이니 대충 맞춰줬지만, 적당히 존중만 해줬더라도 아마 그가 원했던 파트너 사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진심에는 진심으로, 놀이에는 놀이로 응대한다는 걸, 맥락 없는 예쁘다는 칭찬에 반감을 갖고, 대화가 통하는 것에 큰 호감을 얻고, 예의와 정직을 중요시한다는 걸 알기만 했어도 잘 지내지 않았을까?
하고 싶을 때 부르라면서, 정작 부르면 이러해서 안 된다 저러해서 안 된다 단서가 붙었다. 하고 싶긴 한 건지. 절대적으로 시간을 맞춰주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시간을 온전히 맞춰주길 바라면서 약속을 딱히 만들지는 않는다니. 그는 기가 막히게 운명 같은 우연이 딱 맞아떨어지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이쪽도 일 많고 시간 없으니 그냥 될 때를 얘기해달라 해도, 다시 대화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껍데기만 가지고 사람을 대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싶었다. 인간 거죽을 쓰고 있으면 뭐하나,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저 나이 들 때까지 모르는데. 그 와중에도 사회 생활을 무난하게 잘한다는 지점은 그가 선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할 수 있는 데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으니, 당하는 입장에선 그저 오른쪽으로 엄지를 살짝 밀어 친구 삭제하기라는 선택을 해야지 어쩌겠나. 서로 같이 한 게 많아 애틋하고 추억이 다분한 사이라면 모를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인데 굳이 만날 필요도, 다른 기회를 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신동엽 시인께서는 '껍데기는 가라'라고 했지만, 현대사회는 껍데기와 알맹이 모두 중요한 것 같다. 마냥 순수하기엔 사람도 사회도 스스로마저 인지 못하게 복잡해졌으니까. 다만 어떤 껍데기를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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